2012. 4. 29. 23:47ㆍCULTURE/SCRIPT(NEWS)
[기획⑥ - 한국교회사]한국교회, 知ㆍ 信ㆍ 行으로 부활 꿈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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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시점은 학자들마다 다양하지만 대개 120년으로 삼고 있다. 한국교회는 120년이라는 짧은 세월 속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부흥·발전해 왔으며 전 인구의 약 25%가 개신교인이라는 경이로운 결과를 낳았다. 한국교회의 화려한 이면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한국 교회의 어두운 자화상도 있다. 대형교회 지상주의와 세속화, 경제발전으로 인한 신존의식 저하 등은 바로 현 세대가 해결해야 할 몫이자 후대에게 남겨줘선 안 될 당면과제로 남겨졌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시점의 국내 상황은 국운의 쇠함과 불교나 유교에 대한 허탈감을 들 수 있으며 학자들은 이 시기를 종교적 공백기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의 역사는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윌리암이라는 군함이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마량진 앞에서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에게 바실홀이라는 사절이 성경을 준 것을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832년에는 칼 큐츠라프(Karl Guetzlaff)라는 네덜란드 소속 선교사가 최초로 황해도와 백령도를 거쳐 원산도에 도착해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을 건넸다는 기록이 있다.
큐츄라프 선교사가 입국한 이후 33년만에 런던 선교회 소속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려던 중 대동강변에서 관군에게 순교당한다. 이 때 전해진 성경은 한국교회의 씨앗이 됐다.
이어 1870년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만주 선교를 개척하는 한편, 대원군 때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문이 굳게 닫혀 있던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000부씩 간행됐으며,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번역 간행된 후 한국인들의 적극적 노력으로 한반도에 수용됐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裏面) 다양한 사회적 요인 존재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기독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1910년 국권 상실의 기간까지 기독교인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런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에는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요인이 있었다.
한말이라는 당시 상황은 관료들의 부패와 불교나 유교의 종교에 있어서 생명력을 상실한 점과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라는 특수환경 속에서 교회는 치외법권 영역으로 자리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전쟁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인들의 신앙을 보고 계속 교회를 찾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 무렵 가장 주목 받을 만한 사건은 원산과 평양을 잇는 대부흥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의 공포에서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도피처로써 기능을 갖는 교회와 국권이 강탈당하는 민족적 위기가 교회 성장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일제 치하에서 탄압이 본격화 되던 상황에서도 한국교회는 지속적 성장을 유지한다. 일제 초기에는 국망의 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켰기에 가능했으며 3·1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활약과 호의적 자세는 복음전파에 있어 탄력을 더하는 계기가 됐다.
반면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1941년 2차 대전 발발은 당시 한국교회가 5,000개였던 것에서 3,800개로 줄어든 것에서 심각한 개신교인 감소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신학교 설립과 전도운동으로 재건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러던 중 감리교의 재건 및 복흥파 분열과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 신신학(新神學) 문제로 기장이 각각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분열 속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개신교(감리교)신자로 기독교계는 한국사회로부터 많은 수혜를 받았으며 이는 기독교 세력의 외형적 성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교회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성장운동을 전개했으며 이에 따라 장로교는 1954년 선교 7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무교회 면(面)에 교회세우기 운동을, 감리교는 1954년 웨슬리 탄생 250주년 기념 대부흥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100교회세우기운동을 펼쳤다.
이런 각 교단의 노력으로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장로교 1,200, 감리교 500, 성결교 250, 기타교파 100여개를 합쳐 약 2,050개의 교회가 설립됐다.
일제, 광복, 한국전쟁 속에서도 끊이질 않는 부흥
1960년대는 에큐메니칼(교회간 일치와 연합)운동으로 한국교회의 분열을 회개하고 교파간 단합으로 민족에게 봉사하고 복음전파에 주력하자는 민족복음화운동이 한국교회의 거듭남을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4년 ‘한국복음화운동추진회’의 탄생은 연인원 100만명이라는 화려한 결과를 낳았으며 1973년의 ‘민족복음화운동’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전도대회로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던 초대교회의 기적처럼 연인원 450만명이 집회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진 1977년 여의도 민족광장에서 개최된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라는 전도 집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로 연인원 150만명이 동원됐으며 외국의 도움이 아닌 한국 강사진으로만 진행됐다는 것, 8만명이라는 결신자를 얻었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헌신적인 노력은 1980년대 중반 기독교 인구가 1,000만명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결과는 각 교단의 교회성장정책을 기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정책 중 하나가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최소 3년이라는 단독 목회 경력을 요구하는 조항이었다.
이로써 안수 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개척 교회가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생겨났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성장 기반이라는 면과 훈련되지 않은 목회자들이나 부실한 교회를 양산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1980년대의 교회성장은 오순절 계통 즉 순복음교회의 절대적 성장이 한 몫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오순절 계통의 뜨거운 성령운동은 단일 교단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순복음교회를 탄생시켰으며 이를 통해 자극 받은 한국교회들이 말씀보다는 은사나 신비주의로 편향되게 하는 단점도 드러냈다.
한편 1990년대는 경제성장이라는 풍요로움 속에서 신존의식(神尊意識)이 저하됐으며 고나광지, 휴양지, 위락시설을 포함한 위락 시설의 발달과 여가산업의 발달이 사람들을 교회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대형화 추세로 양적인 팽창에만 치중한 나머지 새신자 전도보다는 수평이동을 통한 교세 불리기 혹은 그 이상의 썬데이 크리스천 등의 거품신자로 교인 수가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경제성장으로 세속화 되거나 종교조직으로 전락해 복음전파라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으며, 세속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다.
목회자들의 영성 부족 및 경제 성장에서 교회성장 둔화
특히 목회자의 영성 상실과 갈수록 줄어드는 청년들의 감소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한국교회의 위기가 단순히 교인감소라는 마이너스 성장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목회자들이 보여주는 리더십 부재는 성경과 신학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한체 진행되는 설교에서나 기도하는 목회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목회자들의 사역에 있어서의 문제는 결국 신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역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며 이는 목회자의 자질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복음전도 … 세속적 욕구 해소로 변질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근 한 포럼에서 모 교계 원로 지도자는 한국교회가 위기의 도약 사이에 서 있으며 화려했던 지난 세기만을 바라며 ‘몸 부풀리기’라는 중병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대형교회 지상주의와 새신자 전도가 아닌 신자 수평이동이라는 거짓 전도, 교회의 세속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토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복음전도라는 지상명령을 목회자나 신자들의 세속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창구로 변질시켰음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는 1903년 원산과 1907년 평양대부흥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얽매여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앙인들이 복음에 대한 순수성과 기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생명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고자 노력했음을 잊고 있다는 지적이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한결같이 말하는 이유가 헌금 강요, 세속적 풍토, 희화화된 강단, 말씀 없는 설교 등을 꼽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에 대해 또다른 원로 신학자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부터 그 문제가 출발한다고 지적한다. 깊은 영성과 체계적이면서 깊이 있는 말씀을 전하고 윤리적 소양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없기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폐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교단분열로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로 상처를 주고 ‘나는 정통 너는 이단’이라는 성경적 근거 없는 감정적이면서도 자의적인 잣대로 서로를 난도질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성경에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라는 말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로 인류의 죄를 사하사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으니 이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최근 인구센서스 발표 이후 개신교계는 1,200만이라는 기독교인이 860만으로 현격히 감소함에 따라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 상황은 채 얼마되지 않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과연 오늘날 신앙인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개신교에서 몸 담고 있다가 일탈해버린 형제들을 다시금 구원의 길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볼 때 가장 우려스러운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청년들의 부재,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하나는 신학생들의 질적저하는 물론이거니와 신학교·교회간 목회자 수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지난 1세기의 화려한 부활을 꿈꾼다면 말씀, 기도, 행함이라는 가장 원론적인 점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길 바라고 계시며 의인은 7전8기라는 성경 말씀을 믿으라고 강력히 권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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