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9. 23:49ㆍCULTURE/SCRIPT(NEWS)
[기획⑦ - 총정리]기독교의 역사, 하나님 나라 주권(主權)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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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를 시작으로 한국교회사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어보았다. 한정된 지면에 하나님 6천년의 역사,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기독교역사 재조명 기획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기독교와 관련 과거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 중 중요한 부분을 다시금 짚어보아 현 한국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보고자 한다. 작금의 교계현상이 과거에 일어났던 어떠한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볼 줄 알고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을 때에야 비로소 보다 밝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오랜 갈등과 시련,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던 초대교회는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 맺어진 ‘밀라노 칙령’에 의해 활력을 받게 되고 최대의 자유를 맞게 된다.
니케아회의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항목이 되었으며, 451년 칼케톤에서 진행된 제3차 종교회의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을 가진 참 사람으로 인정하고 신앙할 것을 결의했다.
종교회의를 통해 복음 증거의 탄력을 받아 많은 부흥을 하였지만 이때 정해진 사도신경은 세례문답과 영지주의 등의 이단을 위시한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단 분별의 기준이 성경말씀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교리 논쟁이 심화됐고 많은 이단들과 분파가 생긴 시대이기도 했다.
성경본문 비평의 효시
3세기경 당대의 위대한 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뛰어난 학식은 기독교신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오리게네스는 일곱 명의 비서가 부지런히 구술을 받아 적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을 저술, 무려 2천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으며, 성경 각 권에 대한 주석을 거의 완성했다.
그의 대작 헥사플라는 세로로 된 여섯 개의 단에 한쪽에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다른 한쪽에는 그리스어 역본을 각각 적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세 개의 해석과 70인경을 나란히 적어놓은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본문 비평의 효시로 불린다.
그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중세시대에는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어떤 성경 본문이든 세 가지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성경 본문의 역사적, 문법적 의미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좀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오리게네스는 풍유적 의미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플라톤의 사상을 많이 채택했으며,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이뿐 아니다. 하나님은 저속한 물질과 접촉하실 수 없기 때문에 직접 물질세계를 창조하지 않으셨고, 그 대신 영원하신 아들을 낳아 그로 하여금 영원한 세상을 창조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이 같은 오리게네스의 잘못된 가르침은 그를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게 했다. 로마를 포함한 서방교회는 그의 파문을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방교회는 여전히 오리게네스의 학식과 지혜를 인정했다.
다양한 사상 편력과 저작들로 인해 오리게네스는 정통신학의 아버지이자 이단의 아버지라는 평판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이가 어찌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해석한단 말인가. 비단 오리게네스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많은 교부들에 의해 해석되어진 성경은 각자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과 교리 과연 무엇이 우선인가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하며 순수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것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장로교의 시조인 칼빈(Jean Calvin, 1509- 1564)의 등장이었다.
프랑스의 신학자로 법률공부를 통해 타고난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며 일찍부터 신학 연구에 전념한 그는 가톨릭과 결별한 뒤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에 정착하면서 1536년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체계적인 신학서인 ‘기독교 강요’를 출간했다.
기독교 강요는 대부분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조직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그는 거의 모든 성경에 관한 주석을 펴냈으며, 그 밖에도 신앙과 교리를 다룬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제네바 종교개혁자 파렐은 칼빈을 설득해 제네바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둘은 시의회에 세 가지 의견을 제출했는데 첫 째는 매월 성찬식을 시행하며 부적합한 자는 출교까지 할 수 있는 기강을 세울 것, 둘째는 칼빈의 교리 문답을 채용할 것, 셋째는 모든 시민에게 파렐이 이미 쓴 신조를 강요할 것이었다.
이로 인해 1538년 추방당했지만 다시 제네바에 들어와 활동을 하며 1559년에 제네바 학원을 설립함으로 개혁은 절정에 이르렀다.
칼빈은 자기와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때 동역자였던 세르베투스를 서슴없이 척결했으며, 자신의 가르침과 교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악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칼빈주의는 사람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것으로 그 원인을 돌렸으며, 자신의 말이 아닌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들을 박해하기도 했다. 1643년경에 영국에 신학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모인 자들은 모두 칼빈주의자들로 이들은 자시들이 믿는 것 곧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사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었다.
바로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오늘날 모든 장로교인들에게 최고권위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최고가 될 수 있는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를 더욱 중요시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단이라 정죄할 수 있는가
칼빈은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혹한 인간사냥에 나섰다. 칼빈이 살상한 대상은 대개 칼빈이 제네바시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그의 무자비한 통치와 사상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4년 동안 제네바시를 통치하는 가운데 그는 58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을 말하는 정통이라고 생각하며 숭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로교의 시조 칼빈은 종교국의 모든 판단을 혼자서 독점했으며, 자신의 성경 해석 여하에 따라 모든 죄의 유무와 경중을 결정하였다.
천주교의 종교재판을 보고 자란 그는 특히 종교적 범죄자를 잔인하게 처벌하였다. 춤췄다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했으며,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 잘라 처형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도 사형시켰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어느 누가 이단이라 정죄하고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오로지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이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보다 뛰어나려 하는 것임에 다를 바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복의 역사 가운데서 더 이상의 욕심은 없어야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회복의 역사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다시금 사람과 함께 이 땅에 거하시기 위해 6천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오신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한탄하시고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하신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한 마디로 기독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회복의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셨고,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있던 휘장을 거두어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초림 때에 뿌리셨던 복음의 씨는 사도들에 의해 그리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제자들에 의해 2천년 동안 땅 끝까지 이르러 전파되었다.
그러나 씨 뿌림의 역사 가운데 사단, 마귀가 가라지도 덧뿌리는 사건(마 13:24~25))이 있으니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듣고 깨달아 회개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혹은 권위가 땅에 떨어질까 하여 오히려 백성들을 선동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순수했던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도자들의 권력과 욕심으로 인해 변질이 되었고, 하나님의 이름 아래 총 8차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원정은 사실 중세 유럽의 불만의 입김을 아시아로 배출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세워 보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술책이었다.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일에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말씀(사 14:12~14, 유 1:6)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들은 자신의 행위 그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뿌린 씨는 분명 좋은 씨 하나일진데 그 해석(교리)상의 차이는 많은 분리와 분파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이는 성경말씀이 그 기준이 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이 그 기준이 된 것을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초림 때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도 다를 바가 없다.
자기의 생각과 뜻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고문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 또한 모두 욕심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이러한 일들이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의 역사에 걸쳐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애석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러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인정해도 개종(改宗)을 강요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개종은 과연 어디로의 개종이란 말인가.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한 말씀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욕심은 버리고 더 이상 갈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갈라지고 서로를 음해(陰害)하고 이간(離間)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사단 마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예수님의 이 말씀이 2천년 전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돌아보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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