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이야기

2012. 4. 29. 23:49CULTURE/SCRIPT(NEWS)


[종교개혁이야기①] 루터는 종교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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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0월 28일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교회사에 나타난 종교개혁 이야기를 정리, ‘종교개혁의 배경’, ‘종교개혁자들’, ‘종교개혁의 의의’로 나눠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① 종교개혁의 배경… 루터는 종교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② 종교개혁자들… 루터, 츠빙글리, 칼빈

③ 종교개혁의 의의… 개혁교회, 새로운 형태의 교회 아니다



영역한 성경을 읽는 위클리프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문에 게시함으로써 시작됐다. 하지만 마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 자체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루터 이전의 위클리프나 후스의 훨씬 이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오던 개혁의 의지가 봇물처럼 터져 유럽 전체를 진동시킬 정도의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즉 1517년 이전까지는 교회가 개혁에 전혀 무관심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마틴 루터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루터 이전, 로마 가톨릭의 시퍼런 칼날 밑에서도 진리를 외쳤던 개혁자들과, 루터와 동시대의 인물인 칼빈과 츠빙글리 등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위클리프 “교회의 주인은 주님”


종교개혁이 있기 전의 종교개혁자들로는,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 체코인 존 후스(John Huss), 이탈리아인 제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베젤의 존(John of Wesel) 등이 있다.


이들은 르네상스 시대 때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타락상이나 잘못된 관습 및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로 인해 모두 화형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았다.


존 위클리프(1330-1384)가 내세웠던 것은 ‘교회론’이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글을 써서 “세속 권력은 교황에게서 독립돼야 하며, 교회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고 천명했다. 


또한 그는 영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을 막론하고 ‘통치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중간의 매체들을 통해 전수된다는 당시의 이론을 부인했고, 성찬식 때 먹는 떡과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화체설도 부인했다.


한마디로 위클리프는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라고 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었던 이런 가르침을 로마 가톨릭이 악용한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화체설을 만들었던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다. 사람 위에 군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고자 했고, 사제들의 그러한 역할을 뒷받침한 것이 화체설이었다. 사제가 ‘축복권’과 ‘은혜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당시 100년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1337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 북부에 있는 브리타니 지방이나 아퀘타인 지방의 주권을 영국이 가지느냐, 프랑스가 가지느냐를 두고 싸웠다. 그 때 잔다르크가 등장해서 ‘캐스린에게서 계시를 받아서 샤를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잔다르크를 없애기 위해서 그녀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마녀로 몰아부쳤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위클리프는 “주권은 하나님께 있지 인간인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후스, 성직자들의 타락ㆍ성직매매 비판


체코(당시의 이름으로는 보헤미야)의 존 후스(1369-1415)는 화형을 당하게 된다. 후스는 15년 정도 위클리프와 동시대를 살았다. 위클리프의 사상이 보헤미야에도 전달됐다. 보헤미야의 앤 공주가 결혼을 하면서 교류가 일어났고, 교류하는 가운데 프라하의 제롬이라는 학자가, 영국과 보헤미야를 왕래하면서 위클리프가 썼던 책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후스가 접했다. 


후스는 당시 프라하 대학의 교수(학장)이면서 프라하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설교하는 인물이었다. 대설교가인 그의 영향력은 보헤미야에서 놀라웠다. 


그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접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성직자들의 타락, 성직 매매를 비판했다. 당시 프라하 대학교에 독일인들이 많았는데 갈등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독일로 돌아가 라이프치히 대학교를 세우고 하는 것이 교황이 볼 때는 눈엣가시였지만 없앨 명분이 없던 차에 후스의 사상이 위클리프와 비슷한 것을 보고 후스의 죄목을 잡을 티끌을 발견했다.


그래서 1414-15년 사이 후스를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참석하게 해서 이단자로 몰아갔고 결국 화형에 처했다. 후스가 죽고 난 후, 보헤미야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민족적 봉기를 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후스파’ 또는 ‘타보라이트’라고도 한다. 모라비안, 슬라브, 보헤미안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후스가 감옥에 갇혀있는 수개월 동안 편지를 썼다. 그의 제자가 그 상황을 적으면서 함께 3개월 정도 지냈다. 후스는 마치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나의 전능자가 살아계시니’하며 꿈을 가졌던 것처럼 ‘앞으로 100년 후에 나와 같은 자를 일으켜 세우실 것’을 바라보았다. 후스가 죽고 100년 후인 1517년에 마틴 루터가 등장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기반이 된다’는 터툴리안의 말이 역사 속에서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교황의 ‘눈엣가시’ 사보나롤라ㆍ존, 각각 화형ㆍ사형 당해


이탈리아에서 사제로 있으면서 수도사였던 제랄로모 사보나롤라(1452-1498)는 당시 플로렌스에서 성직자들의 방탕과 타락과 퇴폐와 게으름을 지적하고, 성직자들이 귀족들과 놀아나며 양떼들을 돌보지 않는 사치함을 지적했다. 평민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교황의 눈엣가시가 돼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한 사람이 15세기의 위대한 미술가 미켈란젤로다. 불신자였던 그는 사보나롤라의 청렴한 신앙을 보고 타락한 삶에서 돌아서게 됐다. 그래서 그의 위대한 그림과 작품이 전해져 내려오게 됐다. 


베젤의 존은 1479년에 마인쯔라는 독일의 가장 큰 교회의 종교재판에서 ‘너는 원죄도 부인하고, 면죄부도 부인하고, 금식도 부인하고,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설도 부인하는 이단이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포기하라’는 핍박을 받았지만 그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이상 대략적으로 살펴 본 영국의 존 위클리프, 보헤미야의 존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베젤의 존 같은 사람이 후에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마틴 루터가 있기 전에 살았던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이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사망하기 15년 전인 1483년에 태어난 마틴 루터는 10대 때 사보나롤라의 청렴한 삶에 대해 들었을 것이고, 베젤의 존이 죽고난 지 3,4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베젤의 존 이야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종교개혁의 대명사 마틴 루터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참고: 교회사 강좌(라은성), 기독교교회사(김영재), 교회개혁사(이상규),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김재성) 등

이병왕기자,wanglee@newsmission.com(뉴스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