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9. 23:37ㆍCULTURE/SCRIPT(NEWS)
만지케르트 전투(비잔티움 vs 사라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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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케르트 전투
내부갈등과 배신
비잔티움 군대 알프 아르슬란에 패함
로마누스4세가 포로
로마누스4의 귀환이후 관료들은 이기적 욕심에 패위시켜버림
제장 악화와 정예부대가 없는 불안정한 제국
이어지는 부끄러운 십자군 역사 시작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는 1071년 8월 26일에 비잔티움 제국과 알프 아르슬란이 지휘하는 셀주크 제국(Seljuq) 군대간의 전투로써, 제국의 바스프라카니아 테마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근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결정적인 패배중의 하나로 결말이 났으며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는 적에서 포로로 잡혔다.[4] 만지케르트 전투는 아나톨리아에서 투르크 부족에 대한 제국의 저항을 완벽하게 무력화시켰다.[5]
이 전투는 초창기 투르크 부족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고, 2년 동안 엄청난 수의 투르크 부족의 군인과 정착자들이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밀어닥치게 만들었으며,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을 산산조각 내면서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동시대 작가들을 포함한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대학살이 아니었다. 많은수의 용병과 징집된 아나톨리아인들은 알프 아르슬란이 그들을 추격하길 거부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6] 로마누스를 포함한 모든 비잔틴의 지휘관들은 살아남아 혼란스러운 아나톨리아의 무수한 내전에 참가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은 이후 이 결정적인 전투에 참가할 만큼의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소집할 계획조차 하지 못했다.
영향 [편집]
비록 오렌기간동안 비잔틴 제국의 대참사로 여겨졌지만, 만지케르트는 초기 역사가들이 상상하기에 대참패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틴이 상대적으로 잃은것이 적었다고 평가하며,[12] 많은 부대가 전투중에 살아남았고 몇달후에서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계속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비잔틴 제국의 모든 사령관들(두카스, 타카네이오테스, 브리에니오스, 데 바일류,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제)들이 살아남았고 다른 사건에도 참여했다.[13]
두카스는 아무런 피해없이 퇴각했고, 재빨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그곳에서 로마누스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펼쳐 미카일 7세를 바실레이오스(basileus 비잔틴 황제)로 선언했다.[7] 브리에니오스는 자신이 맡은 부대를 퇴각중 얼마의 병력을 잃었다. 셀주크는 퇴각하는 비잔틴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이때 당시는 만지케르트를 탈환하지도 못했다. 비잔틴군은 재집결하여 도케이아(Dokeia)로 진군했고 이곳에서 일주후에 풀려난 로마누스와 재회했다. 가장 심각한 손실은 황제의 값비싼 화물이 실린 마차일 것이다.
황제에게 있어서 전투로 일어난 재난은, 간단히 말해 아나톨리아 중심부의 상실이다. 존 율리우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는 그의 비잔틴제국에 관한 3부작에서 이 패배는 "치명타다, 비록 완전히 무너져 함락되기까진 수세기가 남았지만, 아나톨리아의 군관구는 문자 그대로 제국의 심장이며 만지케르트 이후 수십 년 후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비잔틴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Byzantium)"라는 작은 책에서 노리치는 이 전투를 "제국이 존재했던 7세기 반 동안 가장 심각한 재난"이라고 묘사했다.[14] 당대 비잔틴 역사가 안나 콤네나(Anna Komnene)는 실제로 전투가 일어난 수십 년 후 기록하길
“ "로마제국의 운은 그들의 최저점으로 가라앉았다. 동방의 군대는 모든 방향으로 흩어졌는데, 왜냐하면 투르크군이 흑해, 헬레스폰트, 그리고 에게 해, 시리아 해(지중해), 그리고 다양한 만(bay) 같은 그 중에서도 팜필리아(Pamphylia), 실리시아(Cilicia),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비워놓아 밀려났던 이집트 해(지중해)등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15] ”
몇해가 가고 십년이 가고 만지케르트는 제국의 재난이 되었다. 따라서 후세의 기록들은 군대의 규모와 부상병의 수를 과장했다. 비잔틴 역사가들은 가끔 이날의 재난을 회상하고 한탄하는 모습을 모인다. 이 전투는 제국이 또다시 마주치게 된 재난의 정확한 지점이었다. 이 전투는 즉각적인 재난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셀주크로 하여금 비잔틴이 이길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천년이 된 로마제국(비잔틴과 셀주크 모두 비잔틴을 여전히 이같은 명칭으로 불렀다.)으로 보지 않게 하였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찬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전하게 만들고, 전투 이후에 이어진 투르크의 친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10년간 소아시아의 전역은 완전히 점령당했다.[14] 결국 전에 일어났던 황제에 대한 음모와 찬탈은, 로마누스의 운명 자체로도 끔찍했지만 정국을 불안정하게 하고 수세기동안의 혼란을 유발했다.
전투 이후에 일어난 연쇄된 사건들은, 전투와 관련된 것을 우선으로 하면, 몇 년후 제국의 발밑을 위태롭게 하였다. 그것들은 왕권에 대한 찬탈을 포함하는데, 우선 로마누스의 불행한 운명이 있고, 로셀 데 발류는 그의 3,000명의 프랑크족, 노르만과 게르만 용병들과 함께 갈라타(Galatia)에서 독립된 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16] 그는 자신을 압박하던 황제의 삼촌 존 두카스(John Doukas)를 패퇴시키고 보스포르스(Bosphorus)의 아시아 해안에 있는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 우즈쿠다르(Uskudar)를 파괴하며 수도로 진군했다. 제국은 결국 데 발류를 격퇴하기 위해 셀주크에 손을 벌렸고 셀주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이 사건은 셀주크가 채울 수 있는 공백지역을 만들었다. 셀주크 인들이 1077년 그들의 수도를 니케아(Nikaea; 이즈니크(İznik)에 세우기로한 선택은 제국의 투쟁이 새로운 기회가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욕구로 설명할 수 있다.
얼마 지나고 나서, 비잔틴과 동시대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로 비잔틴 제국의 운이 쇠락되었다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후세의 십자군운동의 원인으로 해석되었는데, 1095년의 제1차 십자군최초의 십자군은 아나톨리아의 패배이후 비잔틴 황제의 서방에 대한 군사적 지원요청으로 인해 시작되었다.[17]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서방은 만지케르트를 통해 비잔틴 제국을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보호자로 보지 않게 된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델브룩(Delbruck)은 이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로 제국은 향후 수 년 동안 전장에 효율적인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미리오케팔론 전투(Battle of Myriokephalon), 혹은 미리오케팔룸( Myriocephalum)의 전투로 알려진 이것은 비잔틴 제국의 중대한 '쇠락'의 지점으로서 흔히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된다. 두 전투는 백년의 기한을 두고 떨어져 있지만, 호화로운 비잔틴군이 좀 더 가벼운 셀주크인 적들의 매복에 당해 패한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리오케팔룸의 의미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Manuel I Komnenos)가 힘을 유지함으로써 제한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일이 "순교한 용감하고 올바른 사람"인 로마누스와 그의 적들에게 똑같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결과 "제국은...회복되지 못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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