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암몬 사람들

2013. 1. 25. 07:13CULTURE/SCRIPT(NEWS)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암몬 사람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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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아들이 조상… 사사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적대 

암몬 사람들은 요단 동편 산지(Trans-Jordan)의 얍복강에서 사해(Dead Sea) 동편의 아르논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날 요르단의 영토인 암몬은 현재까지도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다양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독일이나 미국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제라쉬와 페트라 등 고대의 유적지에서 역사적 자료를 얻을 수 있고 성서와 관련된 고대의 문헌과 유물들을 일부나마 찾아내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몇몇 문헌과 유물들을 통해 적어도 암몬 사람들이 다른 가나안의 사람들처럼 북서 셈어를 사용했고 유사한 문화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나하스(삼상11:1)와 하눈(삼하 10:1) 같은 암몬 왕의 이름들은 히브리어와 모압어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물론 암몬이 아람과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한때 아람의 속국이었기에 아람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암몬은 가나안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사를 생업으로 했다. 특별히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시작하여 에돔과 모압 땅을 거쳐 아람과 앗수르를 잇는 ‘왕의 도로’(King’s way)는 지역 경제와 문화적 교류를 활발하게 했다. 성서에 의하면 암몬의 수도는 ‘랍바’로 왕의 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삼하 12:26). 랍바는 현재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암만에서는 망대로 사용되었던 탑과 주전 10∼8세기 암몬이 가장 번성했을 때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조각상들이 발견된 바 있다. 

롯의 자손, 암몬 

가나안 땅의 사람들 중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사람들을 암몬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몰락에서 몸을 피신한 롯과 그의 두 딸들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중 하나의 이름은 벤암미였고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혈족이 된 암몬 자손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진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암몬 족속의 땅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에게 기업으로 준 것이었고 롯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혈육 관계였기 때문이다(신 2: 19∼20).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지파들 사이에 기업을 나눌 때도 요단강 건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땅은 얍복 강을 경계로 암몬의 땅을 제외시켰다. 

이스라엘의 적이 되다 

그러나 암몬은 사사시대부터 오히려 이스라엘의 적이 되었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 암몬은 이에 동조하여 이스라엘을 점령했다(삿 3:13).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자 여호와는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자손의 손에 이스라엘을 주었고 결국 암몬과 길르앗에서 대적하게 되었다(삿 10장). 이후 암몬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다. 사사시대, 무엇보다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의 주인공인 입다와 싸움을 한 이들도 암몬 자손이었다(삿 11장). 

암몬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것은 사울과 다윗의 시대였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한 암몬 왕 나하스와 싸워 이겼다(삼상 11장). 사울과 암몬 왕 나하스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에 다윗은 오히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하눈과 그의 신하들의 오해는 다윗과의 전쟁으로 발전시켰다(삼하 10장). 암몬은 급하게 아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다윗에게 대항했지만 결국 강력한 다윗에게 굴복했다(삼하 10:19). 암몬은 더 이상 다윗을 대적할 만한 힘을 잃어버렸고 다윗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크나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자신의 휘하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사랑했던 다윗은 밧세바를 얻기 위하여 급기야 암몬의 랍바를 공격할 때 우리아 장군을 앞세워 공격하게 했고 그 전투에서 우리아 장군이 전사했다(삼하 11장). 

다윗의 범죄는 이스라엘 역사의 아픈 과거가 되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게 될 고난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윗이 겪게 된 직접적 고통은 아들의 죽음과 또 다른 아들의 반란이었다. 아버지를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을 피해 다윗은 한때 자신의 속국이었던 암몬으로 도망했다. 다윗 이후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은 암몬의 몰록 혹은 밀곰 신을 경배했고(왕상 11:7, 33), 나아마라 불리는 암몬의 여인과 결혼하여 르호보암을 낳았다(왕상 11:1; 14:21). 

앗수르의 속국이 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면서 암몬 땅은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합과 아람왕 벤하닷의 싸움에서 암몬 땅은 아람에게 뺏겨 결국 아람의 속국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왕하 20장).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살만에셀 3세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853년 가나안의 국가들은 아람 왕 하닷에셀의 지휘 아래 연합군을 결성하여 앗수르에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카르카르에서 전쟁을 치렀는데 이 연합군의 목록에는 12명의 왕들이 등장한다. 이 왕들 중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합이다. 

아합은 연합군 중 2000대나 되는, 두 번째로 많은 숫자의 병거를 보냈다. 또한 목록의 마지막 줄에는 루후비의 아들 암몬 왕 바아사라는 인물이 군사를 보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몬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이 대부분 성서를 근거로 하고 있었기에 이 암몬 왕의 이름의 발견은 암몬의 연대기를 작성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전 732년 디글랏 빌레셀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암몬은 유다처럼 조공을 바치고 속국이 되었다. 디글랏 빌레셀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암몬의 왕은 사니푸였고 그의 아들 푸두-일루 역시 앗수르에 충성을 다했다. 앗수르의 조공 목록에 의하면 암몬이 바친 조공의 양은 유다의 5분의 1이었다고 한다.

암몬은 고대 중동 지역의 정세에 재빠르게 합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앗수르가 바빌론에 멸망하자 암몬 왕 히살렐은 갈대아 즉 바빌론의 부대와 함께 유다를 공격했다(왕하 24:2). 아모스서 1장 13절은 암몬이 전쟁 중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정도로 잔인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암몬의 죄악은 결국 그들의 수도 랍바와 함께 그 족속이 기억되지 못하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했다(렘 49:1∼6; 겔 21:28∼32). 그러나 암몬 자손은 강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유다의 바빌론에 의한 멸망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로 온다는 소식에 암몬 사람 도비야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함께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이에 대해 근심했다(느 2:10). 그는 성전이 중수되자 분노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느 4장). 비록 암몬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과 혼인했지만(느 13:23), 그들의 유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는 삭을 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주전 164년 헬라문명의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이 마카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암몬 사람들은 이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대항했다. 그러나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패배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암몬 사람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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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등은 섬기던 神 ‘몰렉’에게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쳐 

솔로몬은 이집트 왕의 딸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을 하였다. 물론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는 국제 혼인을 통해 정치적 연맹을 꾀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잘못은 혼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아들인 그는 분명 여호와가 무엇에 진노하시는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서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하여, 아람, 모압, 암몬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겼고 여호와께서 이에 얼마나 진노하셨는지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은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손에 맡겨져(삿 10:6∼7)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솔로몬의 죄악은 여기에 있었다. 그와 혼인한 이방 여인들은 분명 그들이 고향에서 섬기던 신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종교적 관습을 가지고 왔다. 솔로몬은 그 신들을 위해 신전을 지어주고 여인들과 함께 이 신들을 섬겼다(왕상 11:5, 7, 33). 

암몬의 신 몰렉(밀곰, 몰록)을 섬기다. 

암몬의 여인이 섬기던 신은 밀곰(왕상 11:5, 33; 왕하 23:13) 혹은 몰록(왕상 11:7; 왕하 23:10)이라 불리고 있다. 이 신의 이름은 때로는 몰렉이라고도 불렸다(레 18:21; 20:2∼5; 사 57∼9; 렘 32:35). 여기서 우리는 통칭으로 몰렉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몰렉의 어원은 셈어에서 왕이라는 의미의 mlk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몰렉은 바알과 유사한 신으로 암몬뿐만 아니라 베니게, 그리고 베니게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까지 이르는 영향력 있었던 신으로 보인다. 성서는 몰렉을 섬기는 것뿐만 아니라 몰렉을 섬기는 종교적 관습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레위기에 의하면 몰렉의 제사에는 아이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레 18:21).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자는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의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레 20:2∼5) 

이렇듯 극명한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몰렉을 위한 신전을 짓고 그곳에서 경배했으며 결국 이스라엘 자손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고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렘 32:35) 예루살렘은 동쪽과 남쪽에 골짜기가 있어 마치 언덕의 형태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중 동남쪽의 골짜기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불렀다. 예레미야 7장 32절에서 죽임의 골짜기가 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곳에는 구약시대를 비롯하여 신약시대까지의 수많은 무덤들이 발견된 바 있다. 특별히 이 골짜기에는 몰렉에게 제사지내는 도벳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었다(렘 7:31∼32). 도벳의 어원에 대해서 ‘타다’라는 뜻을 가진 ‘taph’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히브리어의 ‘toph’가 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이 희생으로 드려질 때 들리는 울음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북을 쳤던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힌놈의 골짜기의 도벳은 유다 왕 요시야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는 어떤 사람도 몰렉에게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왕하 23:10). 도벳의 파괴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모습의 예가 될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렘 19:13) 

카르타고의 도벳 

요시야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때문인지 더 이상 힌놈의 골짜기에서 도벳의 예가 발견된 바는 없다. 암만에서는 주전 1400∼1250년께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신전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사람이 희생 제물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암만의 미흡한 고고학적 발전은 아직까지 이 수수께끼의 신과 그 관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도벳의 모습과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발견되었다. 카르타고는 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주전 3000년께부터 이미 고대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주전 9세기께부터 베니게의 식민지로 가나안적인 문화가 발견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르타고는 주전 146년 로마에 의해 멸망하였다. 1920년부터 1970년까지 행해진 카르타고에서의 발굴은 주전 8세기부터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공동묘지를 세상에 드러냈는데 이는 주전 4∼2세기께 그리스의 문헌에 등장하는 카르타고의 종교적 관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카르타고의 대표적인 신은 베니게를 고향으로 하고 있는 바알 함몬이라는 신과 그의 배우자 타닛이라는 여신이었다. 바알 함몬은 바알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며 타닛은 베니게의 사렙다 지역에서 발견되는 여신으로 아쉬타르테나 아낫 같은 베니게의 풍요의 여신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바알 함몬은 초승달이 태양을 덮고 있는 모습이 상징이며 타닛은 둥근 얼굴과 양쪽으로 쭉 뻗은 팔 그리고 삼각형 형태로 하체가 표현된 마치 인형이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카르타고에서 발견된 공동묘지의 비석들에는 이러한 바알과 타닛의 상징들이 조각되어 무덤의 주인이 이 신들에게 헌물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에는 영아의 시신을 화장하여 담은 작고 붉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어 아이들이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플라토(424/423 BC∼348/347 BC)의 기록에 의하면 카르타고에는 실제로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제단 앞에는 두 팔을 벌린 그리스의 신 크로누스의 청동상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학자들은 크로누스가 초승달 모양의 낫이 상징인 것과 제우스 이전의 서열 높은 신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바알 함몬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나안의 바알처럼 뿔 달린 청동상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자녀 외에도 희생 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따로 키웠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전쟁과 같은 위급한 시기에 이 귀족들이 키운 200명의 아이들이 바쳐지기도 하였으며 제사 동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실제로 북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