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모압 사람들
2013. 1. 25. 07:15ㆍCULTURE/SCRIPT(NEWS)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모압 사람들 ①
암몬처럼 롯의 아들이 조상이었지만 이스라엘과 등돌려
사해 동쪽 산지의 사람들
요단 동편 암몬의 남쪽 경계인 아르논 골짜기부터 남쪽으로 에돔의 북쪽 경계인 세렛 시냇가까지 살고 있었던 모압 사람들은 암몬 사람들과 상당히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암몬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가 충분하지 못했던 것처럼 모압에 관한 자료 역시 그리 많지 않다. 모압 사람들에 관한 대부분 자료는 아직도 성서에 의존하고 있다. 그나마 암몬에 대한 역사와 고고학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자료는 디본에서 발견된 메사 석비이다. 특히 메사 석비는 열왕기하 3장과 관련된 성서 역사와 본문 이해를 위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이 석비는 다음 호에 다룰 것이다).
모압의 영토는 사해 해변을 따라 위치해 있었고 북쪽의 경계인 아르논 골짜기는 암몬과 나누고 남쪽의 경계인 세렛 시냇가는 에돔과 나누고 있었다. 에스겔서 25장 9절에 의하면 모압의 국경 도시들은 북쪽에는 벧여시못과 동쪽에는 바알므온, 남쪽에는 기랴다임이 있었다고 한다. 이사야는 모압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주요 도시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사 15, 16장). 이 도시들에는 모압 아르(혹은 알), 모압 기르, 바잇, 디본, 느보, 메드바, 헤스본, 엘르알레, 야하스, 길하레셋 등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들은 디본과 헤스본인데 디본의 경우 모압의 신이었던 그모스의 신전이 있었던 장소였다(사 15:2). 헤스본의 경우 아모리 왕 시혼이 한때 모압에게서 뺏은 땅이었지만(민 21:26) 결국 이스라엘이 출애굽 과정에서 모압 땅을 점령할 때 정복당한 곳이기도 했다(민 21장). 이 도시들의 이름과 메사 석비를 통해 우리는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히브리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로 문법적인 면은 물론 단어나 표현 방법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명사는 복수로 쓰일 때 단어 끝에 -im을 어미로 사용하고 모압어는 -in을 어미로 사용한다. 또한 히브리어 여성명사는 주로 -ah로 끝나는데 모압어는 -at로 끝난다.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다
암몬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몰락에서 몸을 피신한 롯과 그의 두 딸들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중 큰딸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모압으로 모압 자손의 조상이 되었다(창 19:37). 모압의 아버지가 된 롯은 원래 아브라함의 조카였는데 결국 모압은 아브라함의 핏줄인 셈이다. 이집트를 나와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과의 전쟁을 피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9) 그러나 암몬과 모압은 여호와의 총회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신 23:3). 이렇듯 혈족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암몬처럼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드러냈고 시혼에게서 헤스본을 빼앗는 광경에 두려움을 표현했다(민 22:3).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 불리는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려고 했지만 결국 여호와의 축복이 이스라엘과 함께함을 알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민 22∼24장).
그러나 모압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축복을 정작 이스라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고 모압의 신들에게 제사했다(민 25장). 결국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모압의 신들을 섬긴 자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러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악행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악행에 여호와는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며 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삿 3:12).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보내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했지만(삿 3장),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다시 모압의 신들과 다른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배신했다(삿 10:6).
풍요로운 땅
구약성서는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사사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모압과의 관계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심지어 출애굽기 15장 15절에서는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여호와를 찬양할 때 모압 영웅이 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 요르단의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해 주전 12세기 이전의 모압 땅의 고고학적 흔적을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몇몇 고고학적 흔적 중 중요한 유적지는 아르논 골짜기 남쪽 10㎞ 정도 떨어진 발루(Balu)라 불리는 곳이다. 이 유적지는 성서의 모압 땅 알 혹은 아르라 불리는 도시(민 21:28; 사 15:1)로 추정되며 주전 3000년께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흔적이 발견되었다. 1930년 이 유적지에서는 이집트 왕의 모습이 조각된 석비가 발견되어 모압 땅까지 이집트가 진출했음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했다. 이 조각은 이집트의 람세스 Ⅱ세(주전 1279∼1213년)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람세스 Ⅱ세는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세운 자신의 거대한 석상에 가나안 원정 당시 정복한 나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 무압(muab) 즉 모압 땅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압은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시작하여 에돔을 거쳐 암몬과 아람, 그리고 앗수르를 잇는 ‘왕의 도로(King’s way)’가 지나가는 곳으로 이집트가 이곳을 정복하고자 했던 이유는 명백하다. 모압은 이 도로를 통해 석회석과 사해에서 나오는 소금, 그리고 향유를 수출했다. 더불어 모압 땅은 비록 더운 장소이기는 하나 요단강 서편(이스라엘) 지역보다 훨씬 기온이 낮고 강우량은 높아 초목을 형성한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곳은 양과 염소 같은 가축 떼를 키우는 데 용이했고 모압 왕 메사의 경우 이스라엘에 양털을 조공으로 바치기도 하였다(왕하 3:4). 이러한 풍요로움은 왜 베들레헴 출신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흉년이 있을 때에 모압 땅으로 피신하였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룻 1:1∼2).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인 엘리멜렉과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은 가뭄과 기근 때문에 모압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두 아들 중 하나는 모압 여인이었던 룻과 결혼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이 적대관계에 있긴 했지만 아마도 결혼은 성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탈무드의 유대 전통에 의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남성은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룻은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와서 보아스와 결혼했고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룻 4:22). 사울은 모압과 싸웠지만(삼상 14:47), 모압의 피가 흐르는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 그의 부모를 모압 왕의 보호 아래 있게 하였다(삼상 22:4). 그러나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신뢰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왕이 된 후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삼하 8:2). 모압은 솔로몬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으며 모압의 여인은 솔로몬의 아내가 되었다. 솔로몬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신전을 지어주고 여기에 제사했다(왕상 11:1, 7, 33).
<모압 사람들 계속>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0&sCode=0000&arcid=0006771757&code=23111617
[고고학으로 읽는 성서-(1) 가나안 땅의 사람들] 모압 사람들 ②
그모스神을 앞세워 메사王 때 잘나갔지만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황폐하고 멸망”
모압의 신 그모스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된 다윗은 한때 사울의 암살 음모를 피해 몸을 숨겼던 모압을 쳐서 정복하고 고대의 전쟁 방식에 따라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삼하 8:2). 솔로몬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모압 사람들 중에 솔로몬 왕의 아내가 된 여인도 있었을 정도로 모압은 이스라엘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모압의 문화와 종교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에 영향을 주었고, 결국 솔로몬 왕마저 모압의 신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한 어느 산봉우리(오늘날 멸망산으로 불린다)에 신전을 지어 주었다(왕상 11:1, 7, 33). 이 신전은 꽤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멸망산에 올라가 제사를 계속 지냈다. 그모스 신에게 제사하는 관습은 요시야 시대까지 이어졌다. 요시야가 파괴한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신전 중에는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신을 위한 것이 있었다(왕하 23;13).
가나안의 신 그모스는 주전 2500∼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에블라 문서에 가미스(Kamish)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신은 모압 사람들의 주요 신으로(민 21:29; 렘 48:7, 13) 성서는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렘 48:46). 그러나 그모스는 이름의 어원마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는 신으로 정확한 모습이나 종교적 역할과 관습 역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모압 땅에서 발견된 유일한 문헌인 메사 석비에 모압을 다스리는 신으로 전쟁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왕기하 3: 27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가 자신이 전쟁에 불리하자 그의 신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암몬의 신 몰록(몰렉)과 관련된 제사 관습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심지어 학자들은 그모스와 몰록이 동일한 신이었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암몬의 신을 몰록으로, 모압의 신을 그모스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유사한 종교적 관습을 가지고 각각 다른 이름의 신으로 전승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모압 왕 메사의 아버지 이름은 chemosh-mlk으로 ‘그모스는 왕이다’ 혹은 ‘그모스는 몰록이다’로 읽힐 수 있어 그모스와 몰록이 같은 신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글귀 중 메사는 전쟁 중에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아쉬타르-그모스에게 헌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학자들은 이 아쉬타르-그모스는 여신으로 우리가 이쉬타르 혹은 아세라라 부르는 가나안의 어머니 여신이라고 본다. 이 여신은 모압 땅에서는 최고의 신이었던 그모스의 배우자였을 것이다.
메사 석비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모스의 주요 역할은 전쟁의 신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모압 땅에서 발견된 뾰족한 모자를 쓰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토상이 전쟁을 주관하고 있는 그모스의 모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모습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메사 석비를 통해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는 것처럼 모압의 신 그모스 역시 모압 사람들의 적에 분노하고 전쟁에 개입하고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메사 석비는 1868년 현재 요르단의 디반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디반은 모압 땅 디본(민 21:30)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석비의 발견은 성서 외에 가나안 땅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어 이 시대 역사적 퍼즐을 완성케 하고 있다. 메사 석비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 1m, 너비 60∼68㎝, 두께 60㎝로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한 모압어로 기록되어 있다. 발견 당시 석비를 서로 차지하려던 디반의 주민들로 인해 산산조각났으나 다행히 탁본을 해두어 34행의 글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몇몇 주요 글자나 단어들이 손상되었고 마지막 몇 행은 사라져 버렸지만 다행히 글 전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석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압 왕 메사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그모스 신을 위해 신전을 건축했고 그모스 신은 당시 모압 땅 메드바를 차지하고 있던 오므리와 그의 아들을 부수리라는 약속을 했다. 결국 메사는 그모스 신의 자비로 이스라엘과 싸워 이겼고 그의 땅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에돔을 몰아냈다.
학자들은 석비의 내용이 주전 840년경으로 추측되는 열왕기하 3장과 동시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윗이 정복해 놓은 모압 땅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의 손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메사 석비에서도 오므리가 모압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열왕기하 3장 4절에서도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바치고 있었지만 아합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왕하 1:1; 3:5). 그의 배반으로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여호사밧 그리고 에돔은 연합하여 모압을 치러 갔다(왕하 3장). 모압의 사람들은 연합군이 올라와서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갑옷 입을만한 자부터 그 이상이 다 전쟁에 참여했다. 전세는 모압에 유리하게 흘러갔고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메사 석비는 메사가 이스라엘의 칠천 군사를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그모스가 어떻게 자신을 도와 승리로 이끌었는지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메사 석비는 성서 속 역사를 성서 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이 석비의 글귀 중에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단어들이 있다. 17행에서 메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 땅에 ‘여호와의 화로’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파괴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성서 외 자료로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우리의 관심은 31행에 등장하는 모압이 사로잡은 호로넨에 살고 있던 ‘beit (Da)vid’에 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괄호 부분의 글자가 훼손되어 석비 발견 당시 이 단어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텔 단 석비를 통해 우리는 이미 남왕국 유다 왕조를 ‘베이트 다비드 즉 다윗 왕가’라 호칭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바 있어 이 호로넨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윗 왕가 혹은 유다와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모압이 한때 다윗이 차지했던 땅이었고, 비록 후에는 북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아합의 딸 아달랴가 유다로 시집가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왕국 사이를 생각한다면 모압 땅 호로넨에 다윗의 자손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은 아닐 것이다.
메사의 모압은 독립국으로 100년 정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앗수르 디글랏 빌레셀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님루드에서 발견된 디글랏 빌레셀의 토판에는 모압 왕 살마누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압 땅은 수십만 마리의 양털을 조공으로 바쳤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가 풍부해 기쁨과 환희의 옥토였다(렘 48:33). 그러나 예레미야(렘 48장)는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고 예언했다. 실제로 모압 땅은 황폐해졌고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0&sCode=0000&arcid=0006813432&code=231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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