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3. 07:17ㆍCULTURE/PLACE
조선조의 대표적인 읍성인 해미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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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는가. 유난한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언제나 아픔과 슬픔이 빼곡하게 깃들어 있음을.
세월의 두툼한 나이테를 두른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이 아름다운 고성(古城)에 깃든 자욱한 슬픔은 오늘도 그렇게 유난히 짙푸른 하늘빛으로 서성이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된 해미읍성은 마을 한가운데에 드넓게 자리잡고 있다. 오랜 세월에도 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읍성은 금방이라도 시간을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할 만큼 고색창연하다.
흔히 보는 산성과 달리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으로 손꼽힌다. 조선 성종 22년(1491)에 완성한 석성으로 둘레 약 1.8km, 높이 5m, 총 면적 6만여평의 거대한 성이었다. 성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동·서·남쪽에 세 개의 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관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해미 순교성지. |
그러나 성 안에는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아니 영원히 철거될 수 없는 수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말 천주교 탄압이 이뤄지던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당시 관아가 있던 이 곳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수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이 처형됐다. 성 안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신자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모진 고문을 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남아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당시 많은 신도를 일일이 처형하는 게 힘들자 읍성 밖 해미천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이 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변할 것을 걱정한 많은 교인들이 남보다 먼저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1935년 베드로 신부가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했는데 수습된 뼈들이 몇 가마니에 이르렀다. 이 유골은 줄곧 음암면 상홍리에 안치돼 있었으나 l975년 이규남 신부가 해미천변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리로 옮겼다. 지금 그 곳은 해미순교성지가 조성돼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천주교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지난날의 끔찍했던 천주교 수난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오늘도 재촉하고 있다.
*가는 요령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 순교자들을 고문하는 도구로 썼다. |
*별미
꽃게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서산시청 근처 축협 앞에 자리한 삼기식당(041-665-5392)의 꽃게장백반과 꽃게탕을 놓치지 말길. 꽃게 집산지인 안흥항과 가까운 서산은 싱싱한 꽃게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중 삼기식당은 굴젖 절인 국물을 1년간 삭혀 마늘, 생강 등 갖은 양념을 해서 꽃게장을 담근다. 시원하고 구수한 맛과 상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꽃게장이 별미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왜목마을 소개>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월출(月出)까지 모두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장소로 유명하다. 충청남도 서해의 땅끝 마을로서, 해안이 동쪽을 향해 돌출되어 있고 인근의 남양만(南陽灣)과 아산만이 내륙으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왜가리의 목처럼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라고 해서 왜목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두 8가구가 살고 있으며 7가구는 어업, 1가구는 농업에 종사한다.
독특한 지형구조 때문에 바다 너머 경기도 화성군까지는 서로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고 수평선이 동해안과 같은 방향이어서 일출·일몰·월출을 모두 볼 수 있다. 또한 지구의 공전에 따라 태양이 경기도 화성군 앞바다의 국화도와 장고항 사이로 이동해가면서 떠오르고 지기 때문에, 석문산(79m) 정상에 오르면 일출과 월출의 위치가 시기별로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동해의 일출과는 달리, 이곳의 일출은 한순간 바다를 가로지르는 짙은 황톳빛의 물기둥이 만들어지면서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일몰은 대난지도(大蘭芝島)와 소난지도 사이의 비경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활활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빛을 감추며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검붉게 물들이면서 바닷속 깊이 잠겨버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일출과 일몰 광경을 볼 수 있는 날이 최소 180일이나 된다. 태양이 국화도 위로 뜨는 7월과 장고항 틈 사이로 떠오르는 1월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미읍성 소개>
해미읍성은 서산과 홍성 예산 땅과 두루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은 성으로 그 이름이 아름다워 나그네의 발을 끄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정미현과 여미현이 조선조 태종 때 하나로 통합되면서 해미현이 탄생했는데 예쁜 이름과는 달리 군사도시로 주목을 받았다. 복잡한 해안선을 이용해 왜구들이 서산 일대의 곡창지대를 노략질하자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이곳에 배치하고 거대한 성곽을 쌓은 것이다.
491년 성종 22년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된 이 성은 높이가 4미터 둘레가 2킬로미터에 이르며 동문 서문 남문 등 세 곳에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는 문루가 세워져 있다. 특히 이성은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 보기 드물게 평지에 쌓은 석성으로 축성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담쟁이 넝쿨로 뒤 덮인 성벽은 고풍스런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성터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면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어 가슴속까지 상쾌해지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본래 이 성은 토성이었던 것을 성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평지성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밖에 깊은 수로를 만들어 이중방어벽을 구축하였다. 또 성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어 방어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탱자나무성이라고도 불렸다.
성안에는 관아를 두어 군사적 기능과 함께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기능을 겸하기도 했는데 그 관아 터에 동헌과 객사 교련청 등을 복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해미읍성은 충청도 수군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보통 1,500여명의 병사들이 머물며 훈련을 받았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훈련원 봉사로 이곳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해미읍성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비극적인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천주교가 민간에 퍼져나가기 시작할 무렵 충청도 지방에서 그 열기가 높았는데 악명 높은 박해의 현장이 바로 해미읍성이었다. 여러 고을 중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탓으로 해미읍성에만 유일하게 대규모 감옥 시설이 있었기에 충청도 천주교도들을 모두 이곳으로 잡혀오게 되었다.
감옥 터에는 호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당시 천주교도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 놓고 고문하던 철사줄이 그대로 박혀 있다. 천주교에서는 이 나무를 순교목으로 기념하고 있으며 해미천변 생매장 터에는 순교탑을 세우고 성지로 조성해 놓았다.
- 이 상 -